Beyond the Page(독서감상문)

[독서감상문] 김훈 작가님의 허송세월

직장병행 학습자 2025. 3. 1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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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 43p.

 

김훈 작가님의 책 허송세월을 읽었다.

중년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인생의 물음표 앞에 서게 된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답을 얻는 좋은 방법이 된다.

 

광고 카피라이터이자 작가인 박웅현님은 그의 저서 "책은 도끼다"에서 김훈 작가님의 글을 한문장 씩 짚으면서 읽으면 단어 하나 버릴게 없다고 평가한다.

또한 매 문장 빛나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발견되는,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읽을 수 밖에 없는 글이라고 평가한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이런 글을 신문 기사 일듯이 죽 그냥 읽으면 아무것도 잡을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렸듯이 파도타기 입니다.

저는 자전거 여행도 이 호흡으로 읽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었어요. 매 문장 빛나는 생각들이 끊임 없이 발견되는 글들이니까요 - 박웅현 "책은 도끼다" 59p.

 

개인적으로는 김훈 작가님의 허송세월에서 서문 '늙기의 즐거움' 부분이 가장 감명깊다.

박웅현 작가님의 평 처럼 단어 하나 버릴게 없고 매 문장 빛나는 생각들을 끊임없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핸드폰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 있다. 무한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 사이에 시차가 없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계좌도 찍혀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관성적 질감은 희미한다, 죽은 뒤의 시간은 낯섦은 경험되지 않았어도 뚜렷하다. 이 낯선 시간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평안이나 불안 같은 심정적 세계를 일체 떠난 적막이라면 더욱 좋을 터이다. - 허송세월 7p.

 

휴대폰에 날아온 부고문자를 보고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찾아온 사물화된 죽음이라는 표현은 쉽게 생각해낼 수 없는 명문이다. 

이 문단에서 김훈 작가님이 기대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낯설기만 할 죽음이 평안하였으면 좋겠는데 그보다 평안함이나 불안함 같은 감정을 못느끼고 떠나면 더욱 좋겠다는 바램으로 읽혔다.   

 

늙는다는 것이 아직은 낯설고 가끔은 무섭고 때로는 두렵다.

나이를 먹어갈 수록 신체 능력은 퇴보하는 것이고 마음과 몸이 힘든 날이 많아진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집은 고요해지고 예전에 그렇게 바랐던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는데 외롭다는 생각이 함께 찾아온다.

 

늙으니까 혼자서 웃을 수밖에 없고 혼자서 울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은데, 웃음과 울음의 경계도 무너져서 뿌옇다. 웃음이나 울임이나 별 차이 없는데, 크게 나오지는 않고 바람만 픽 나온다. 

기쁨, 슬픔, 외로움, 그리움, 사랑, 행복 같은 마음의 침전물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로되, 이 물컹거리고 들척지근한 단어들을 차마 연필로 포획할 수가 없어서 글로 옮겨 남들에게 들이밀지 못한다. - 38p.

 

김훈 작가님의 나이가 되면 외로움도 희노애락도 특별하지 않을까? 많이 겪는다고 다반사는 아닐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세월을 감내하고 때로는 싸우며 생긴 손과 발의 굳은 살만큼 마음에도 굳은 살이 베겨 웃음도 울음도 잘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를 먹을 수록 웃음도 울음도 줄어드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 기쁨, 슬픔, 외로움, 그리움, 사랑, 행복 같은 감정이 없어질리 없다. 대상이 없어서 또는 표현하지 않은지 오래되서 또는 표현을 하면 마음이 무너져서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이후로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임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이 가벼움으로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 낼 수 있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 하듯이, 세수하고 면도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 51p.

 

아직은 크게 생각하지는 않는 나이라서 죽음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누구나 맞이해야 하는 것이고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것이므로 죽음은 미리, 잘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쓰던 등산장비를 후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나니까 날이 저문 것을 알겠다. 산에 올라가기보다는 산수화를 들여다 보는 편이 더 한갓지고, 아끼던 장비도 애착이 가지 않는다. 장비를 받아가는 후배도 나의 늙은이 행세가 민망했는지 고답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선배, 물건이 아직도 멀쩡한데, 좀 더 쓰시지요."

"멀쩡하니까 주는 거다. 물건이 문제가 아니야."

"벌써 산을 끊으려는 것입니까?"

"끊는게 아니야, 저절로 그렇게 되는군."

"저절로요?"

"그래, 저절로. 끊기 전에 저절로 물러서게 되니 좋은 일이지. 너도 며칠 지나면 나처럼 되는 거야."

"며칠요?"

그래 며칠이지."

- 11-12p.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 그러므로 인생을 너무 벌여놓지만 말고, 너무 쫓겨다니듯 살지도 말고, 정리하고 추스르고 나눠주고 베풀고 표현할 필요가 있다. 

 

등산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은 모두 젊은이들에게나누어 주었고, 나머지는 버렸다. 책을 버리기는 쉬운데,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 뒤축이 닳고 쯔그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신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이며 동반자이다. 헌 신발은 연밀할 수밖에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헌 신발은 불쌍하다. 그래도 나는 내다 버렸다. 뼛가루에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52p.

 

인생사 칠팔십이라고 이 나이라면 살 날이 더 적은 나이다.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 때가 온다면 하루 하루 어떤 기분일까.

오늘처럼 내일도 여전히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하루 하루 정리하고 준비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이 책을 다 읽고, 바람직한 노년에 대해 생각했다.

욕심을 버리고 묵은 짐을 내다 버리고 좋은 것, 남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은 나누고 더 가지려고 애쓰지 않고 오후에 두어 시간 햇볕을 쪼이며 몸과 마음이 빛으로 가득차는 것을 느끼는 한 없이 한가하고 한 없이 느린 것 같지만 쏜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느끼는 노년이면 좋겠다.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중략>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 43p.

 

내 노년에 대한 소원이 있다면, 아내가 여전히 곁에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꺼지지 않아 영적으로 충만함과 평안함을 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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